Canon EOS 20D | 42.0mm


여름 끝 무렵, 집 주위를 걷다가 눈에 띈 한 작은 동네 서점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형 서점은 종종 갔어도 동네 책방은 거의 가지 못했던 터라 궁금하기도 하고 잡지나 좀 볼까 하고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작은 서점에 책들이 오밀 조밀 꽂힌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재미있더군요.


서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마지막에 선 곳은 소설을 모아 둔 책장앞 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많이 보던 고전들도 있고, 제목이 낯선 신간 소설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눈에 띈 책이 "세계대전 Z" 입니다. 한두달 전에 씨네21에서 세계대전 Z 소설과 영화화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좀비 전쟁을 다룬 장르 소설이고 꽤 괜찮다는 평이었습니다. 조금 이야기를 들었던 소설이라 그런지 한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상당히 두꺼워서 쉽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몇 페이지 들여다 보니 내용이 어렵지 않아 괜찮아 보여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Canon EOS 20D | 42.0mm


책이 두꺼워 처음에는 괜히 샀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새 집에서 책을 읽기는 커녕 블로그에 글도 잘 올리지 못하고 있거든요. 너무 걱정 말고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지하철에서라도 조금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가방에 집어 넣었습니다. 책이 두꺼운 덕분에 가방도 좀더 뚱뚱해 졌습니다만 다행히도 무게는 책의 부피에 비해서는 가벼웠습니다.


처음 몇일은 책을 거의 읽지 못했는데, 차가 막히고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두 페이지 읽다 보니 책이 술술 읽히기 시작합니다. 재미있게 쓴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더군요. 전공에 관련된 책들은 아침 출근 시간에 읽던 내용이 저녁 퇴근 시간에 이어지지 않아서 아침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다 보면 재미도 떨어지고 금방 피곤해져서 읽기 쉽지 않았는데, 세계대전 Z는 소설이라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책은 여러 사람의 경험담을 짧막하게 모아 놓은 것이라 앞 내용을 조금 잊어 버려도 뒷 내용을 읽는데 큰 무리가 없더라구요.



Canon EOS 20D | 35.0mm


소설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좀비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좀비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로 부터 들은 경험담을 모아 놓은 보고서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지금 (2011년)과 가까운 미래에 어느 날 세상에 좀비가 나타나게 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며 인류가 멸종될 위기에 처합니다. 인류는 가까스로 멸종 위기에서 벗어나 좀비와의 대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 승리하게 됩니다. 이 좀비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소설 속 주인공은 좀비 전쟁을 좀더 명확히 정리하고자 이 전쟁과 관련된 굵직 굵직 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그들의 말을 이 보고서에 옮겨 담습니다. 보고서 형식을 취한 일종의 페이크 다큐이죠. 인터뷰의 대상은 좀비 때를 피해 추운 지방으로 떠났던 피난민으로 부터 미국의 대통령까지 매우 다양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도 전쟁 무용담 부터 좀비를 직접 겪은 공포담까지 다양합니다.

좀비물이라기에는 좀비에 대한 설명이나 좀비가 사람들을 어떻게 잡아 먹는지에 대한 묘사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초반에 좀비들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묘사한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21세기에 각 국의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또 그 연결 관계를 통해 좀비들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면 SARS나 돼지 독감 (H1N1) 이 전 세계로 전염되는 뉴스를 보는 듯 합니다. 대부분의 좀비는 이웃 동네, 이웃 도시, 이웃 나라를 통해 퍼져 나가지만, 일부는 좀비에 물린 사실을 숨기고 비행기를 타고 안전한 나라로 도망간 사람들로부터 퍼지기도 하고, 불법 장기 이식을 위한 밀수 장기들을 통해서도 옮겨집니다.

좀비가 세상에 퍼지고 난 뒤에는 재난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로 전개됩니다.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게 된 이후 각국 정부들은 소수의 정부 관료와 엘리트들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고 나머지 대다수의 국민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 아마게돈이나 딥 임팩트 같은 곳에 나온 장면과 유사하지요.

일단 정부기관들이 안전히 피신을 하게 되고 사람들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다음에는 좀비를 지구에서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펼치게 됩니다. 이 부분부터는 약간 밀리터리 소설의 분위기를 띕니다. 국가간 전쟁을 위해 만들었던 무기 체계들을 좀비를 상대하기 위해 새로운 체계로 재편하는 부분의 설명이 나오는데 흥미롭습니다.

내용이 조금 산만한 점도 있는데, 내용 전개가 빠르고 분위기가 다양해서 무리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용도로도 좋을 것 같고, 좀비물이나 SF를 좋아하는 분도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가볍게 소설 한편을 읽었습니다. 좀비가 퍼져 나가는 모습이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최근에 개봉한 컨테이젼이란 영화를 보고싶어 졌습니다. 그리고 번역은 조금 아쉽더라구요. 한글을 읽고 원 영문을 상상해야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은 문장들이 조금 눈에 띄었습니다.

10월 1일 추가
어제 저녁 극장에서 컨테이젼을 보았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다 가까스로 개발된 백신에 의해 진정되는 내용인데요, 초기에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모습이 세계대전 Z에 묘사된 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나더군요. 세계대전 Z 와 컨테이젼 모두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바이러스란 소설도 비슷했던 것 같네요. ^^;